인사와 마음의 나눔
저녁 예배에 반가운 분이 함께해서 참 좋습니다. 믿음의 작은 진보가 우리에게 더 큰 기쁨과 성숙을 안겨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작은 퇴보는 공동체 안에 갈등과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전도집회를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세며 보내고 계신지요? 특히 이번 집회를 맡은 강사님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기도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과 뜻을 품고 더 많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품기 원합니다.
입을 여는 복음 전파의 용기
어떤 사람이 올지 안 올지, 말씀을 들을지 아닐지는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전할 수 없고, 그 타이밍에 순종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가 눈치 보는 일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입을 여는 일입니다. 지금 수요예배에서는 교회가 무엇인지 계속 다루고 있습니다. 바른 교회 이해가 바른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의 균형
우리는 그동안 교회를 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교회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무형 교회를 뜻한다고 생각했지만, 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가 유형 교회를 가리킬 때도 많이 사용됩니다. 무형의 교회,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무형 교회는 유형 교회 안에서 형성되고 자라나며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곳이며, 우리는 그분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모임의 질서와 예배의 품위
성도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입니다. 이 모임은 정해진 순서와 질서를 따라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과 6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강조하고, 고전 14:26과 40절에서는 교회의 질서와 덕을 세우는 사역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덕을 세우는 것이 바로 청지기의 사명이며,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는 ‘적당히’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대충이라는 뜻이 아니라 품위 있게, 예의 바르게 드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삶 전체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품위
유형 교회에서 드리는 공적 예배뿐 아니라, 무형 교회인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입니다. 삶에서도 품위가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역사 속에서 늘 품위 있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고상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나를 의지할 때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의 예배와 권위의 실천
가정에서도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며, 품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저도 가족 앞에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가족이 나를 가장 잘 알기에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음은 큰 은혜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고향에서도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중심이 되어 가족과 친척을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훈련의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른 교회의 세 가지 표징
바른 교회에는 세 가지 표징이 있습니다. 첫째, 온전한 말씀 선포가 있는가?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복 받는다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둘째, 성례 집행이 바르게 이루어지는가? 성례에는 침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치리와 권증이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이 치리와 권증을 논의하면서 ‘권위, 권한, 권력’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권위, 권한, 권력의 불가분 관계
교회 안에서 ‘권위’, ‘권한’,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세 요소가 건강하게 작동할 때 교회도 건강합니다. 이들은 직분을 전제로 합니다. 직분자에게는 반드시 권위와 권한, 그리고 권력이 따릅니다. 이 세 가지가 잘 이해되고 믿음 안에서 실천되어야 교회는 안정되고 균형 있게 세워집니다.
말씀 선포와 직분의 권위
말씀 선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장로교 등 메이저 교단은 신학과 안수를 받은 이만이 강대상에 설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이를 ‘강대상 권’이라고 합니다. 교단의 헌법에 따라 말씀 선포 권한이 부여되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으로 말씀 선포의 권위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더 본질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직분과 직임의 성경적 기준
에베소서 4:11-14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목자), 교사를 세우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세 목적을 위해 직분자들이 세워져야 하고, 직분자의 권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며 헬라어로 ‘소마’를 사용합니다. 이 ‘소마’는 단순한 몸이 아니라 부활을 전제로 한 몸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단어로 ‘푸토마’(죽은 몸), ‘사르크스’(부패한 육신)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라면 ‘소마’로서, 더러운 말을 피하고 품위 있는 예배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권위자의 책임과 사명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장성한 불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믿음과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에피그노시스’—인격적이고 경험적인 앎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괴술에 속는 신앙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직분자와 공동체 질서
직분자들은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각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위임이며, 상대방의 권위를 존중하고,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목사는 남장년회의 일원으로 그 질서를 존중해야 하며, 반대로 회장도 목사의 권위를 인정해야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권위는 신뢰로 작동한다
권위는 위로부터 부여된 정당한 통치 자격이며, 인격적 신뢰 없이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듯, 직분자는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권위 의식과 권위주의의 구분
권위 의식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입니다. 반면 권위주의는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일방적인 명령과 억압으로 공동체를 위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대표적인 권위주의자였습니다.
교회 직분자의 사명
교회의 직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의 범위를 알고, 그 안에서 충성되이 섬겨야 합니다. 권한을 넘어서는 ‘주제넘음’은 갈등과 불신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따라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교회는 온전하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와 권위 구조의 일치
에베소서 1:19-23은 권위, 권한, 권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부는 권위, 성자는 권한, 성령은 권력을 통해 구속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이 일치된 구조 안에서 교회도 질서를 따라 성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19-23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다음 시간 예고와 적용 권면
다음 주에는 목자, 장로, 감독이라는 세 직분이 성경에서 어떤 권위와 사명을 지녔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입니다. 성도님들도 스스로 성경을 찾아보시고 자신이 받은 권위, 권한, 권력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권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