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64 ἔρχομαι 엘코마이 erchomai
오다 come, 나타나다 appea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엘코마이(Homer 이래)는 '오다, 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인격과 무생물에 다같이 사용되며, 전치사나 문맥에 따라 특별한 관계나 여러가지 어감을 지니며, 자연적 사건, 마음의 상태, 편지를 받는 것, 소유물의 이전, 혹은 계약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언급을 한다.
엘코마이의 제의적 용법은 특별히 중요하다. 헬라인의 헬라적 경건은 신이 인간에게로 오는 것 또는 인간이 신에게로 가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엘데(오다)라고 부르는 기도의 권고(참조: 시 80:2[79:3])는 고대의 여러 기도문이나 여러 마술 파피루스에서 발견된다(참조: S. Schnoider). 그러나 형식적인 유사성을 제의하면 이교도 예배와 성경의 예배 사이에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
2. 70인역본의 용법.
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1,000회 이상 나오며, 35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보(가다, 도착하다, 들어가다)를 번역한다.
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주로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제의적 기사에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성소에, 예루살렘에 오는 것,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그의 말씀, 천사, 메시야, 시대, 구원의 날, 성령의 도래, 혹은 열방들이 하나님의 기업에로 옴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편, 욥기 등에서는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 특히 악한 것이 온다.
3. 신약성경의 용법.
엘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31회 나오며, 대부분 '오다, 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엘코마이는 인격체와 사물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오는 것은 나타나는 것, 공개적으로 나아오는 것, 현장에 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때때로 결정적 사건들, 자연적 현상, 조건 등에 사용된다. 눅 14:31에서 '적대적 접근', 행 19:27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 막 5:26에서 '더 악화되는 것'을 나타낸다. 눅 15:17에서 '자기 자신에로 오는 것', 고후 12:1에서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가는 것'을 나타낸다.
(a) 공관복음의 용법.
① 엘코마이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이 어군은 신현현의 핵심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께서 1인칭으로 엘돈을 사용하신 말씀은 그의 메시야 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메시야 임무를 진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러(막 1:38),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막 2:17), 새로운 생활 질서를 세우러(마 5:17), 땅에 불을 붙이러(눅 12:49), 그리고 불화를 조장하러(마 10:34 이하) 오셨다.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으며(눅 19:10; 눅 9:56; 마 18:11), 그의 책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막 10:45; 마 20:28). 예수님이 그의 생의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에 묘사되어 있으며, 세례(침례) 요한의 금욕주의와는 다른 이 세상의 좋은 것에 개방적이었다. 막 1:24; 눅 4:34에서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들의 파멸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오심을 비슷하게 묘사하였다.
② 엘코마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종종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온다. 하지만 참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마 8:2; 마 9:18; 마 14:33; 마 15:25; 막 5:33; 참조: 마 2:2), 제의적인 행동을 수반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을 수반한다(눅 6:47; 눅 9:23; 눅 14:27). 만찬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오는 것, 혹은 오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눅 14:17 이하). 탕자의 비유에서 오는 것은 또한 잃음과 멀어짐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5:20; 눅 15:30).
③ 엘코마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0; 눅 11: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백성들은 오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하여 찬양을 돌렸다(막 11:10). 이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막 9:1). 미래의 이 나라는 영생을 의미하는 장차 올 세대와 동일하다(막 10:30; 눅 18:30). 미래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 안에 그리고 그의 나라와 함께 오신다(마 16:28; 눅 23:42).
④ 엘코마이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공관복음에서는 구원 시대를 열 메시야는 엘리야가 되돌아 온 뒤에 오실 자로 언급한다(마 11:14; 마 17:10; 마 17:12; 마 27:49; 막 9:12 이하).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그 분인지를 묻는다(마 11:3; 눅 7:19; 눅 7: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그를 메시야로 환영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환호하였다(마 21:9; 눅 19:38; 참조: 시 117:25 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 중에(마 16:27; 마 25:31), 하늘의 구름을 타고(마 24:30; 마 26:64와 병행구) 오실 약속된 메시야이시다. 이를 위한 때는 언제인지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마 24:42 이하와 병행구) 돌연히 임할 것이다(막 13:36). 메시야라고 사칭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올 것이다(마 24:5).
⑤ 엘코마이는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마 21:40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아들을 박해한 농부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러 오시는 포도원의 주인이시다.
눅 13:6-눅 13:7의 무화과 비유에서 하나님은 과원에 와서 그 열매를 구하나 얻지 못했을 때 무화과 나무를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시는 주인이시다.
마 25:19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회계하러 오사 상벌하시는 주인이시다.
⑥ 엘코마이는 결단의 날이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서 엘류손타이 헤메라이("날이 이르다")라는 공식 문구에 의해 소개되는 일련의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눅 17:22; 눅 21:6; 눅 23:29; 마 9:15).
눅 22:7의 "무교절일이 이른지라"에서 이 날은 결정적인 어떤 일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날 날이나 절기이다.
막 14:41의 "때가 왔도다"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하는 시간이다.
눅 2:27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간" 시간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임을 암시한다.
(b) 요한의 기록들의 용법.
①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요한 문서들에서 광범위한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되며 아울러 보다 강한 신학적인 내용을 지닌다. 1인칭으로 된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말씀들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논쟁적인 측면을 지닌다.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요 7:28; 요 8:42).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요 8:14).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있다(요 8:42).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요 5:43) 빛을 주고(요 10:10) 세상을 구원하려고(요 12:47) 오신다. 비록 그가 심판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요 12:47), 그의 오심은 심판을 의미한다(요 9:39). 왜냐하면 빛이 올 때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요 3:19). 그는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으며(요 18:37),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기울일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그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7:27)과 메시야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4:25)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빛, 곧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러 왔고(요 1:7) 예수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인정하고(요 1:15), 세례(침례)-예수님의 현시(manifestation)로서 종말적 의미를 지니는 세례(침례)로써 그의 길을 예비하는(요 1:31) 세례(침례) 요한에 의하여 지지받는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다른 사람들은 도적들이요 강도들이다(요 10:8).
②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본다(요 3:26; 요 6:5; 요 10:41).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한다(요 7:37). 이 초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됨으로써(요 1:47) 특별한 의미에서 오는 것이다(요 6:35). 제자들도 초대를 할 수 있다(요 1:46). 예수님은 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요 6:37)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요 6:35).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에 대한 결정적 권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 오는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다(요 6:45). 다음 그 대답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 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 오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자유 결정은 하나님이 정한 결정이다. 요한의 기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택 사상이 놓여있는 것이다(요 6:65).
따라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신자들로서 그들은 이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요 5:24). 그들은 "주(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고백에 이른다(요 11:27).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며, 그의 기원은 신비로운 것이다(요 3:8).
예수님께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계속 고집하는 결심에 근거하여 있다.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거나(요 5:40), 빛으로 오기를 거부하는 것은(요 3:20) 결국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이다.
③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에게 있어서 엘코마이는 부활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세 가지 신비를 기록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오셨다(요 20:19). 못과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주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함께 한 제자들에게 오셨다. 도마의 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 실체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요 20:26).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때 음식은 주님의 임재로 신성하게 되었다(요 21:13).④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요 14:3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증거하신다. 요 21:22 이하에서도 이에 관해 언급한다.
그렇지만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요 15:26; 요 14: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지상에 오신 것과 같이 보혜사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공동체에 오신다. 보혜사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의 계속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 성령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올 수 있게 한다(요 7:34; 요 8:21-요 8:22; 요 13:33).
⑤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시간의 도래'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그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정한 시점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요한의 공식 문구 엘 케타이 호라('때가 온다')에 의해 소개된다. 요 4:21에서 호라(때)는 미래의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구원의 때는 이미 동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요 4:21; 요 4:23). 이런 사실은 요 5:25의 부활의 때에도 적용된다.
이 점에 관해서 가장 의미심장한 진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영화와 동시에 일어난다. 호라(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상 인간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간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종류에 대한 두 기사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요 7:30; 요 8:20), 둘째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요 12:23; 요 13:1; 요 17:1).
요 16:2; 요 16:4에서는 제자들의 때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박해와 죽임이 있는 순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시대는 이미 주님 자신의 체포의 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요 16:32).
⑥ 요한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4:2에서 "육으로" 오신 자이고, 요일 5:6에서 "물과 피로" 오신 자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요 2:18).
⑦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영원한 하나님은 이미 오셨으며, 지금 오시고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다(계 1:4; 계 1:8; 계 4:8). 그리스도는 빨리 오실 것이다(계 2:5). 교회는 그의 오심을 위해 살아가며(계 22:17), 그것을 대망하는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계 22:20). 그리스도는 도적같이(계 16:15) 구름을 타고(계 1:7)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심판을 가져 올 것이나(계 6:17 등), 메시야적인 환난 후에(계 3:10) 그의 오심은 또한 기쁨도 초래할 것이다(요 19:7).
(c) 바울 서신의 용법.
①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언급보다 그의 종말론적 오심에 관한 언급이 더 많다. 그의 초림에 관한 언급은 엡 2:17; 딤전 1:15에만 나온다.
②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종말론적 기사들은 초대교회 전통의 골격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며 살았다(고전 4:5). 바울의 아람어 간구는 독특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다(고전 11:26).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밤에 도적과 같이 오실 것이다(살전 5:2). 그러나 그는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살후 1:10). 구원의 때는 온전하는 것이 오는 때이며,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는 것이다(고전 13:10).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임할 것이다(골 3:6; 엡 5: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기 전에 배교가 있고 죄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살후 2:3).
③ 바울은 또한 계명(롬 7:9)과 믿음(갈 3:23)이 오는 것과 같은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온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로서 바울 자신은 복음의 축복을 가지고 온다(롬 15:29). 그리고 그는 고상한 말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전 2:1), 복음을 전파하러 온다(고후 2:12). 그는 온유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고전 4:21), 근심으로 나아가거나 징벌하려고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참조: 고후 2:1; 고후 2:3). 그리고 그는 비록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그가 나아갈 때에 낮춤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후 12:20-고후 12:21).
(d)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의 용법.
여기에서는 이 단어의 종말론적 용법이 지배적이다.
① 행 1:11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한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구원 시대의 옴(히 8:8), 기롱하는 자들이 옴(벧후 3:3), 성령의 도래는(행 19:6), 구원 시대가 이미 동텄음을 보여준다(참조: 행 2:17-행 2:18).
② 행 2:20에서 큰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을 언급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③ 히 8:8에서 구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언급한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10:37에서도 마찬가지다.
④ 행 19:6에서 구원의 시대가 이미 동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⑤ 벧후 3:3에서 마지막 날에 기롱하는 자들이 올 것을 말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W. Mundle).
'헬라어로 보는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ἔρχομαι(에르코마이, 살전 1:10)과 παρουσία(파루시아, 살후 2:1)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분석 및 현대적 교육에 대한 적용 (0) | 2024.07.09 |
---|---|
παρουσία(파루시아 parousia) (1) | 2024.07.09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골로새서 3장 1-4절에 나오는 위엣 것과 땅 엣 것 (0) | 2024.07.09 |
ζάω(자오)와 ἐγείρω(에게이로)의 공통점과 차이점 (0) | 2024.07.07 |
ζωή(조에 zo-e-) (2) | 2024.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