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로 보는 말씀

ἀνίστημι(아니스테미 aniste-mi)

egeiro 2024. 7. 9. 15:59

G450 ἀνίστημι 아니스테미 aniste-mi
일어나다 raise, arise.

G1817 엑사니스테미

일어나다 to raise, arise.

1. 아니스타나이와 엑사니스타나이의 의미.

(a) 타동사 및 자동사 용법에 비추어 볼 때 이 용어들은 단순형을 따르며, 성경에서 그 의미는 일반적 용법과 일치한다.

① 타동사로 사람에 대해(Homer. 이래) '일으켜 세우다' to raise up, 예를 들면 누워 있거나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행 9:41); 잠자고 있는 자를 '깨우다' to awaken; 어떤 사람을 어떤 직책에 '세우다', 대제사장을 '세우다'(히 7:11, 히 7:15); 사람을 '추방하다'; 사물에 대해(Post-Homeric): 기둥이나 제단을 '세우다'; 성벽을 '보수하다'.

② 자동사로, 잠에서(행 12:7), 침상에서(눅 11:7) '일어나다, 깨다'; 특히 병자(눅 4:39)와 절름발이(막 9:27; 행 14:10)에 대해; '회복하다'; '말하기 위해 일어서다'(눅 10:25; 행 5:34; 행 13:16; 행 15:5), 재판에서 재판관이나 증인으로 말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에 대해(막 14:60및 병행구 막 14:57); '대적하여 일어나다'(막 3:26; 행 5:17).

(b) 다음의 의미들은 독특하며, 적어도 성경에서 사용될 경우 특이한 강조점을 지닌다.

① '일어나 좇으니라'(막 2:14; 병행구 7:24; 행 8:27).

명령법으로 '일어나서 ~가라'(행 8:26), '일어나 ~들어 가라(행 9:6).

② 수혼법에 의한 결혼으로 죽은 형제의 '자손을 일으키다'(아이를 얻다), 마 22:24와 병행구

③ (역사에서) 어떤 인물을 소개하다. 신 18:15, 신 18:18; 왕상 14:14; 렘 23:4; 렘 30:9; 겔 34:23를 인용해서 예수님을 보낸 것에 대해, 행 3:22; 행 7:37; 행 3:26.

'아무를 고소인으로 세우다'

④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다', 혹은 자동사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다'.

2. 헬라 세계에서 부활.

헬라인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부활을 이야기 한다.

(a) 부활은 불가능하다(Hom. Il.)

(b) 부활은 고립된 기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Plat. Symp.).

헬라인들에게는 시대의 마지막에 일반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상은 생소한 것이다. 실제로 이 사상은 프리지아의 비문에서 비난을 받는다. 행 17:18에서 아나스타시스는 청취자들에게 고유명으로 잘못 이해되어진 것 같다(참조: 행 17:31이하).

3.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부활.

구약성경은 왕상 17:17이하; 왕하 4:18이하; 왕하 13:20이하에서 개인의 부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형태에서 일반적인 부활의 소망을 위한 내적 준비였다(겔 37:1-14; 사 53:10; 욥 19:25이하; 시 73). 그러나 이것은 페르샤의 영향에서 떨어져 공식화 되지는 않았다. 부활은 사 26:19의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와 단 12:2의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에서 최초로 매우 뚜렷해진다. 그리고 그 후 묵시 문학에서 보다 더 포괄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간적인 상태를 획득한다는 교리에서 처음에 의인의 부활이 있고 끝에 악인의 부활사상이 더 즉시 흥미를 일으킨다.

사두개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이 소망을 거부했다(막 12:18과 병행구 행 23:8; Jos. Bell., 2, 165; Ant., 18, 16). 이 거부는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었다: Ber., 9, 5; "미님(Minim)은 단지 한 세상만 있다고 말한다"; Chag., 776, 4; Elisa ben Abuja는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하였다. Sanh. 10, 1은 여기에 정면으로 맞선다: "죽은 자의 부활을 토라에서 추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미래 세상에 참여하지 못한다". 후기 유대교는 부활 소망을 신앙의 확고하고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한다. 매장지에서 선언되는 송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T. Ber., 7, 5): "그가 너희를 일으키리라. 자신 그의 말을 지켜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자를 찬미할찌어다". 헬라 유대교에서 부활의 소망은 영적화 되었다. 요세푸스도 필로도 아나스타시스를 부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의 교리에 의해 불멸에 대한 소망을 해석한다(Bell., 2, 163). 필로는 불멸을 삶의 계속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비적으로 이해하여 개인적인 일로부터의 해방, 새로운 탄생으로 본다(Quaest, 출 2:46, Harris, p. 60이하). 그는 Sacr. AC, 5에서 영혼의 승천을 기술한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며, 지금 여기에 이미 실재한다.

4. 신약성경에서 부활.

(a) 신약성경은 죽은 자로부터의 개인적인 부활에 대해 말한다. 잠들어 있거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일상적으로 불러 손으로 그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행하는 자는 죽은 자에게 그와 같이 행동하고, 그들이 살아난다(막 5:42; 막 9:27을 함께 참조하라; 행 9:40과 행 9:34). 신약성경 자체가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과정들은 주변 세계의 사상에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막 6:14; 히 1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 20:10이하에서는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임을 보여준다. 특히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여지는 부활에 관한 기록들의 특징은 진지하고, 침착하고 엄숙하다. 부활은 메시야 시대의 표징이며, 따라서 고립된 기적들이 아니다(마 11:5; 요 11:25-26; 참조: 요 5:20 이하; 요 6:39-40, 요 6:44, 요 6:54). 마 27:53은 이와 같은 연관성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b)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 선언되고(막 8:31과 병행구; 막 9:9과 병행구 막 9:31과 병행구 막 10:34) 초기의 선포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메시야의 영광으로 높이신 천부의 역사로 묘사된다(행 1:22; 행 2:24, 행 2:31이하; 행 4:33; 행 10:41; 행 13:33이하; 행 17:3, 행 17:31; 롬 1:4; 고전 15:1이하).

(c) 예수님의 부활은 일반 부활의 첫 열매이다(행 26:23: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2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21: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골 1:18: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신약성경에서도 신앙의 내적 논리는 부활을 지향한다(고전 15:22; 롬 8:11; 요 6:39-40; 요 6:44, 요 6:54: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지는 관점은 이중적 부활 사상이다(요 5:29: "생명의 부활 …심판의 부활"; 참조: 롬 14:9; 고후 5:10). 아마도 눅 14:14("의인들의 부활")과 확실히 계 20:5-6("첫째 부활")에서는 유대 전승을 따르며, 생명의 부활은 천년왕국의 시작 무렵 시대에 선행하는 행위로 보여진다. 만약 고전 15:23이하에서 토 텔로스가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휴식"을 의미한다면, 고전 15:23이하도 이와 같은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살전 4:16이하에서 부활한 신자들과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주와 연합하는 일은 심판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계 2:16; 살후 1:9-10; 고전 4:5; 고후 5:10에는 다른 견해가 우월한 것으로 보인다. 부활 개념들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유동적이다. 비록 신자들은 그것을 현재 이미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이 생명의 부활은 여전히 신자들이 소망하고 추구하고 있는 목적이다(빌 3:11; 엑사나스타시스,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발견됨). 딤후 2:18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의 오류와 격론을 벌인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참조: Menander in Iren., I, 23, 5). 엡 5:14에서는 비유적 의미가 강하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고린도에서 부활을 부인한 자들은(고전 15:12) 아마도 유대의 대망의 유물론으로 인한 것이다.

(참조: A. Oep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