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로 보는 말씀

ἐγείρω(에게이로 egeiro-)

egeiro 2024. 6. 27. 18:27

G1453 ἐγείρω 
에게이로 egeiro-
일어나다, 일어서다, 죽은 자를 일으키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동사 에게이로(Homer 이래)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a) 타동사로 '깨우다'(잠에서), 자동사 수동에서 '잠깨다, 일어나다',
(b) 타동사로 '자극하다, 일으키다, 각성시키다, 분발시키다', 자동사 수동에서 '각성하다, 분발하다',
(c) 타동사로 '일어서게 하다, 세우다', (건물 등을) '세우다, 일으켜 세우다', 자동사에서 '일어서다, 오르다',
(d) 타동사로 '죽은 자를 일으키다', 자동사 수동에서 '죽은 자로부터 되살아 나다'를 의미한다. 

[참고 - 이 단어군은 일반 헬라어 문헌에서 종종 나타나며 동사는 호머 이래로, 명사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이후로 나타나고, 아니스테미((G450)의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된다. 따라서 동사의 의미는 타동사로 사용될 때 '깨우다' waken '들어 올리다' life up, '세우다' erect, '자극하다' stimulate, '분기시키다' stir up,

자동사의 경우는 '깨다' awake, '일어나다' get up, '일어서다' stand up 등이 된다.

사람에 대해 사용될 때에는 잠, 무의식,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들, 어떤 행위나 반란 등에로의 자극 받은 사람들, 혹은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사용된다. 명사의 의미는 타동사적 뜻에서 '깨움' waking up, '설립' establishing, 자동사적 측면에서 '깸' waking, '일어섬' standing up, (병에서) '회복' 등이다. 이 용어에 대한 이해 각도에서 본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라는 뜻은 동사적이든 명사적이든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가능한 극소수 예외들 중의 한 사람은 에베소의 메난더(Menander of Ephesus)로서 요세푸스의 저서(Ant. 8, 5, 3(146), Ap. 1, 119)에 인용돼 있다. 그러나 에게르시스(G1454)에 대한 여기의 해석이 휘스톤(Whiston)과 데커레이(Thackeray)의 표준 번역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아나스타시스(G386)의 고전 헬라어문헌 항목에서 이에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개념이 헬라 사상과는 이질적이었으며 오직 상징적으로나 종교 의식상에서, 잠자는 신들을 깨운다는 뜻으로만 사용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이 이상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TDNT Ⅱ 333을 참조). - L.COENEN.]

2. 70인역본의 용법. 
동사 에게이로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히브리어 쿰(일어나다, 일어서다), 우르(깨우다), 아마드(일어서다) 등을 번역하여 바로가 깬 것(창 41:4; 창 41:7),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운 것(삿 2:16; 삿 2:18), 가브리엘이 깊이 잠든 다니엘을 일으켜 세운 것(단 8:18) 등을 나타낸다.

[참고 - 이 단어군의 구약성경 용법은 보통 헬라어의 관용어에 상당하는 것이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군은 사실상 아니스테미(G450) 단어군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며, 이 헬라어는 히브리어 쿰(일어나다 rise), 우르(깨우다 arouse), 아마드(일어서다 stan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바로가 깨었다(창 41:4; 창 41:7),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셨다(삿 2:16; 삿 2:18), 가브리엘이 깊이 잠든 다니엘을 일으켜 세웠다(단 8:18), 아하수에로왕이 잔치 자리에서 일어났다(에 7:7), 모세가 하나님께,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라고 엄숙히 기도한다(민 10:35). 이 단어가 아니스테미(G450)의 동의어라는 점은 창 38:8과 삼하 7:12을 보아 알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아니스테미(G450)가 인간 및 하나님과 모두 관련하여, 사용되었으나 반면 사 45:13 상반절에서는 에케이로(G1453)가 사용된 것이다(참조: G386, 구약성경). 한편 70인역본에서는 이미 이 동사의 두드러진 의미 변화가 발생해, 이를 죽은 자의 부활 및 인간 내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사역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 L.COENEN.]

3. 신약성경의 용법. 
동사 에게이로는 신약성경에서 144회 나오며, 주로 사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에 사용되었다.

 

(a) (a)의 의미에서
① 타동사로, 막 4:38; 행 12:7.
② 자동사로, 마 1:24; 마 25:7; 막 4:27.
③ 비유적으로, 롬 13:11; 엡 5:14.

 

(b) (b)의 의미에서.
① 타동사로, 비인칭 목적어와 함께, 빌 1:17; 인칭 목적어와 함께, '역사 속에서 나타나거나 일으키다': 행 13:22(다윗); 행 13:2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다", 마 3:29과 병행구 눅 1:69.
② 자동사로, '일어나다' stir oneself, 막 13:8과 병행구절; '일어나다' rise up, 선지자에 대해: 마 11:11; 눅 7:16; 요 7:52; 마 24:11; 마 24:24; 막 13:22; 심판 때에 고소자에 대해: 마 12:42과 병행구절.

 

(c) (c)의 의미에서
① 타동사로, 요 2:19 이하; 인격 목적어와 함께, '일어나도록 도우다, 세우다', 마 12:11에서 동물; 행 10:26; 막 1:31; 막 9:27; 행 3:7에서 병자; 약 5:15에서 '건강하게 하다'를 암시한다(참조: Jos. Ant., 19, 294).
② 자동사로 '일어나 강해지다' 마 17:7; 행 9:8; '온전히 일어서다' 마 8:15; 마 9:6 이하; 막 2:12; 또한 속격, '일어나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다" 요 13:4; 마 8:26과 병행구절; 약화된 셈어적 의미에서, 행동의 개시를 표시한다. '시작하다': 출 5:8; 대상 10:12; 대상 22:19; 대하 21:9; 대하 22:10; 마 9:19; 요 11:29; 명령법에서 자주 나온다: "일어나 ... 데리고", 마 2:13; 마 2:20, 혹은 보다 직접적으로 막 14:42과 병행구; '일어나다', 요 14:31; 막 2:9; 막 2:11; 막 3:3; 눅 6:8; 요 5:8; 계 11:1.

 

(d) (d)의 의미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다', 혹은 수동태 '일어나다,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다'는 개인의 부활과 관련하여, 긍정적으로 마 9:25; 마 10:8; 마 11:5과 병행구; 막 5:41과 병행구; 막 6:14과 병행구; 눅 7:14; 요 5:21; 요 12:1; 요 12:9; 요 12:17; 히 11:19에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인격과 결합할 때 이 부활은 메시야 시대 및 모든 죽은 자의 장래 부활의 표징이다. 마 27:52도 참조하라.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우리는 케뤼그마에 대한 그 중요성이 이미 예수님의 예언에서 암시됨을 본다(마 16:21; 눅 9:22; 마 17:9; 마 17:23; 마 20:19; 막 14:28과 병행구. 에게이레인은 마태가 사용하기를 즐겨하는 단어이다). 그것은 부활 기사에서 반영되며(막 16:6; 마 28:7; 눅 24:34; 요 21:4), 사도들의 설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행 3:15; 행 4:10; 행 5:30; 행 10:40; 행 13:30; 행 13:37; 롬 4:24 이하; 롬 6:4; 롬 6:9; 롬 7:4; 롬 8:11; 롬 8:34; 롬 10:9; 고전 6:14; 고전 15:4; 고전 15:12 등; 고후 4:14; 고후 5:15; 갈 1:1; 엡 1:20; 골 2:12; 살전 1:10; 딤후 2:8; 벧전 1:21).

하나님께서는 부활로써 십자가에 달린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를 영화롭게 하셨고(사도행전, 또한 롬 7:4; 빌 2:9-11; 엡 1:20 이하). 그리하여 구속에 힘을 부여하신다(특히 롬 4장과 롬 8장; 고전 15장). 만일 헬레니즘과 다르게 신약성경이 아니스타나이(G450)와 아니스타스다이보다 에게이레인과 에게이레스다이를 더 즐겨 사용한다면(그러나 물론 아나스타시스보다 에게르시스를 더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그 용어들이 하나님의 행동의 구체적 성질을 더 잘 밝혀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부활의 개념은 요한의 신학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요 2:19; 요 2:21; 요 10:17; 요 10:18).

비록 바울이 텅빈 무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에타페, 고전 15:4; 에타페멘, 롬 6:4), 고전 6:13 이하; 고전 15:47; 고전 15:50; 빌 2:6; 빌 2:9에 따르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물질적 견지에서 생각하지 않고, 만물 가운데서 특히 교회에서 우주적 인격(인성)으로 높임 받으신 분의 소마 프뉴마티콘('신령한 몸')으로 생각한다(참조: 골 1:18 이하).

(e)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들의 부활은 특히 바울에 의해 해결되지만, 그 주요한 내용에 있어서 그것은 초기 교회의 일반적 가르침의 일부분을 형성한다(롬 6:4-11; 갈 2:20; 골 2:12 이하; 엡 2:1; 엡 2:5; 고후 4:10 이하; 벧전 1:3). 당연히 이것은 의롭다함으로 얻은 생명과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롬 5:18).

롬 6장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놓인 구원 역사의 새로운 상황을 묘사한다. 새 생명은-아직 감취어져 있으나-믿음의 실재(고후 4:7 이하; 고후 5:7; 골 3:3)이다. 그런데 이 생명은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붙잡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참조: 롬 8:16; 롬 8:23; 갈 3:2; 갈 4:6; 고후 1:22), 마술적인 변화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믿음의 실재인 것이다. 즉 그것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며 하나님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서,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실재이다(롬 8:19 이하; 고후 4:16-18; 빌 3:11 이하). 이 사상은 비록 매우 사실주의적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죽은 자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음을 암시하지는 않는다(딤후 2:18은 이 견해를 이단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참조: 빌 3:10 이하; 롬 8:11 등).

(f) 죽은 자의 미래의 부활에 대해(막 12:26; 눅 20:37; 행 26:8; 고전 15:15-52; 고후 1:9; 고후 4:14; 참조: 사 26:19; 단 12:2). 신약성경에서 부활 생명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유대교에서보다 더 명료한 영적 대답을 얻는다.

막 12:23과 병행구에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악의가 있으나 영성화하는 경향에 아직 영향받지 않은 랍비 신학에 부합한다. 예수님의 영적 개념(막 12:25과 병행구)은 반대로 아주 새롭다. 비록 예수님은 복된 자의 연회에 대해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을 서술하지는 않는다(막 14:25과 병행구; 마 8:11; 눅 13:29; 참조: 잔치에 대해 말하는 비유들). 바울은 특별히 성적 교섭 뿐만 아니라 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고전 6:13). 사르크스는 파괴되고 소마는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 이하; 고전 15:50 이하; 고전 15:40 이하에 대해 참조: 마 13:43).

(참조: A. Oepke; Walter Bauer). 

[참고 - 1. 일반적으로 이 단어군은 신약성경에서도 고전 헬라어 문헌 및 구약성경 항목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에게르시스(G1454)는 마 27:53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단 1회 발견된다. 그 밖의 곳에서도 아나스타시스(G386) 또는 그 동사형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게이로(G1453)는 143회 나타난다(마 36회; 막 19회; 눅 18회; 요 13회; 행 12회; 롬 10회; 고전 20회; 고후 4회; 엡 2회; 갈, 빌, 골, 살전, 딤후, 히, 약, 벧전, 계에 각 1회). 에게이로(G1453)는 마태에 의해 특히 행위의 시작으로서(예: 마 1:24; 마 2:14; 마 8:26; 마 25:7) 그리고 역사 무대에서의 인물들의 등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예: 마 24:7; 마 24:11; 마 24:24). 이 용법은 누가복음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된다(예: 눅 13:25). 마가는 명령법을 택하고 있다(참조: 눅 5:23이하; 요 14:31).

2. 이 단어군이 '소생 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사례들을 조사해보면 처음에는 구약과 유대 묵시에서 이미 모습을 보이는 발전 흐름이 단순히 좀더 진전된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의원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판명된 자들이 예수에 의해 소생된 몇몇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야이로의 딸의 손을 잡고 그녀가 일어나 걷게 만들었다(막 5:41). 공관복음에 의하면(마 9:25; 막 5:41; 눅 8:54이하) 그 어린이의 생명을 소생시킨 것은 예수께서 소녀를 만진 행위와 권위 있는 명령이었다. 이 경우의 명령은 명령법 '에게이레'로써 표현하였다. 나인 성문(城門) 밖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것도 역시 그렇다(눅 7:14; 명령법 에게르테티가 사용됨). 나사로의 경우에는 먼저 감사기도가 있은 후 듀로 엑소("나오라" Come out, 요 11:43)라는 명령 한 마디로 부활된다. "왕의 신하"의 요청에 대해서는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요 4:50). 뒷 부분의 두 사례에서는 당사자들과 목격자들이 가진 믿음 Faith과의 관련성이 강조되며 또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위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음이 역설된다(요 4:50; 요 11:25; 요 11:40). 나인 성의 청년은 단지 그 모친이 불쌍히 여김을 받음으로서 소생 받게 되었던 것이다(눅 7:13). 야이로의 딸(막 5:39)과 나사로(요 11:11)를 일으키시기 전에 예수께서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는) 말씀하신 것도 독특한 면이라 할만하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사망이 예수의 활동을 제한할 수 없고, 그에게서 나온 생명 Life이 사망의 권능을 빼앗았다는 사실, 즉 그 외의 방법으로는 변경시킬 수 없는 죽음 Death과 시간 Time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그것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말씀을 듣고 곁에서 보던 자들이 비웃었다는 점은 기이하고 불가해한 생명부여 능력 Power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 종말론적 부활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제외하고(요 11:24; 마르다) 유대인들이 기껏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바, 그리고 자연스런 일로 여겼던 바는 구약과 똑같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요 11:37). 그러나 지금 하나님, 생명과 사망의 지배자이신 주님께서 그들 앞에 친히 서 계시는 것이다.

3. 이제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 이 개념의 핵심에 이르게 되었다. 빌 1:17을 제외하면,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넘어선 그 어떤 의미로도 결코 에게이로(G1453)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단어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매우 빈도 높게 사용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분명 바울 전도의 지배적 요소임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역사 속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의 부활은 복음 Gospel의 결정적 요소이자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며, 이것이 없이는 모든 믿음도 헛것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사건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 증인될 자들에게 "보이셨던" 것이다(홉흐데[G3700]가 고전 15:5-8에서 4차례 사용된다). 복음 전파자에게 있어서 부활은 복음진리의 시금석이 되었다. 부활을 논박하고 부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며 자신들의 → 믿음 Faith을 텅빈 껍데기로 만드는 것이다(고전 14-17: 케노스[G2756]와 마타이오스[G3152]; 빈 Empty). 결국 부활 신앙은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것이며(롬 4:24), 그의 영이 믿는 자들 안에 살아 있어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참조: 고후 4:14). 우리의 죄를 제거하고(고전 15:17) 사망 권세를 깨뜨린 것은(롬 6:4; 롬 6:9 → 침례 Baptism와 관련하여) 바로 예수 부활의 사실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 단지 하나님을 주체로 하고 예수를 객체로 해서 묘사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 동사는 중간태로써 자동사의 의미를 취하여 예수를 주체로 만들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예: 롬 6:9; 롬 8:34; 특히 공관복음서 막 14:28; 막 16:6; 마 27:63). 이러한 용법의 변화는 부활시키는 능력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하나되시는 아들 역시 이를 소유하고 있음을 밝혀 준다.

4. 이 점은 종말론적 부활을 언급할 때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는 보통 죽은 자를 일으키는 자가 누구인가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즉 그리스도도 될 수 있고 하나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고"(고전 15:52; 마 11:5). 한편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전자는 후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뒤따른다(고전 15:13-17). 고전 15장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부활에 대해 아니스테미(G450) 단어군이 사용된다. 고전 15:42-44에서 바울은 현재와 부활의 때를 대조시키고 있다. 즉 썩을 것(G5356 프도라)과 썩지 아니할 것(G819 아티미아)과 영광스러운 것(G1391 독사), 약한 것(G769 아스데네이아)과 강한 것(G1411 뒤나미스), 육적인 것(G5591 프쉬키콘, 프쉬케에 속한)과 신령한(프뉴마티콘) 몸을 상호 대비시킨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옮겨지며 또 그에 의해서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 약속이 주어진다(마 10:8). 이 권능에 대한 최상의 표현은 아마 마 3:9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L. Co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