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222 ζωή 조에 zo-e- 생명 lif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조에(Homer 이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a) 조에는 헬라에서 유기적 존재들, 동물, 사람, 식물의 물리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특징 지우는 생명성(vitality)이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에 있어서 생명은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며 기계적인 활동과 구별되는 자아 활동의 힘으로 특징 지워진다(플라톤, Leg. 10, 895c ff; phaedr. 245c ff; 아리스토텔레스 An. 2, 2p 422b, 16f.; p413a, 22ff.). 생명의 원인(the cause of life)은 프쉬케(G5590: 영혼 Soul)에 있다고 간주한다.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Apollonia)는 프쉬케를 하나의 대기 같은 실체(an ethereal substance: 아에르, G109)로 생각한 반면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프쉬케를 약동하는 호흡(a fluttering breath: 프뉴마, G4151)으로 생각하였다(H. Diels,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Ⅰ, 425, 42). 헬라어 사고에서 프쉬케(G5590)와 조에(G2222)가 매우 밀접하게 함께 속한 것과 똑같이 프쉬케(G5590)와 소마(G4983: 몸, Body)도 그러하다(Plato, phaerd. 105c ff; Aristotle, An. 2, Ⅰ p412b, 7 ff.). 자연적 생명은 영혼과 육체라는 성분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각 개개인뿐만 아니라 전 우주까지도 살아있는 유기체(조온 엠프쉬콘, 플라톤, Tim. 30b) 또는 영혼을 갖고 있는 세계(코스모스 엠프쉬코스)로 생각되었다. 신들까지도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유사한 두 부분으로 된 본성을 갖고 있는 생물(조아)로 상상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 Metaph. 11, 7p 1072b, 28ff.). 따라서 플라톤은 드네타(thneta, 죽을 운명의 mortal 곧, 인간)인 생물과 아다나타(athanata: 불멸의 immortal 즉 신들 gods)사이를 구별한다(Tim. 38c ff.).
헬라인들은 세 번째의 성분, 곧 이성 Reason,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G3563)이 인간의 생명을 특징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마(G4983)와 또한 다소간 프쉬케(G5590)가 자연적 생명을 구성하는 반면 누스(G3563)는 외부로부터 인간 생명으로 들어가 이 생명을 자연적 생명, 즉 동물의 생명 이상으로 향상시키고 여러 가지 양자택일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신적 요소인 것이다.
(b) 만약 신의 조에가 누스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조에가 자연의 생명력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최고 가능성은 또한 누스이며, 누스는 육체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육체와 구별함으로써만이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인간의 조에는 사람이 그것을 통해 몸과 혼을 결합함으로 조온이 되는 조에가 아니다. 프쉬케는 물질에 있어서 생명력의 원리이지만, 이것은 또한 물질과 대조되는 것인 인간의 자아(selfhood)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에는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생명이지만 또한 특별히 인간의 생명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생명의 가능성은 유기적인 본질에서 성취되지 않으며 이것은 종(species)의 영속화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의 운명을 가지며, 행복과 불행을 알고, 그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은 그것에 고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c)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카타 휘신 젠(자연에 따라 살다)이라는 표어는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본능적인 삶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카타아레텐) 생활, 또는 이성에 따라(카타 로곤) 사는 생활,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존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생활을 암시하는 것이다(유 젠: 잘 살다 to live well; 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1, 9, 19:2, 9, 7 f.; 3, 1, 25f.; 4, 11, 3). 비오스 카타 퓌신(자연을 따르는 생활)이라는 구절도 이와 같은 의미로 발견된다. 고대의 헬라인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폴리스의 공적 업무에의 능동적인 참여로 보았던 반면에 헬레니즘 시대에 있어서 스토아학파는 세상의 외적인 소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와 자신의 내적 생활의 수양을 이상으로 삼았다.
(d) 스토아학파가 외적 생명과 내적 생명 사이를 구별함에 반하여 신플라톤주의는 이 세상의 생명과 내세의 생명 사이를 구별 지었다. 플로티누스(Plotinus)에 따르면 사람이 참으로 자연적인 생명을 소유하기는 했으나 완전하고(텔레이아), 참된(알레디네) 생명은 오직 유일자(the One; 헨[hen])의 유일한 신적 영역에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이 참된 생명으로 가는 길은 육체의 극기와 모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깨끗게 되는 정화(카다르시스[katharsis])를 거쳐 통찰 또는 직관(데아[thea])의 순간에 도달하며, 이는 곧 인간이 참 생명을 얻고 그것과 일체가 될 때인 것이다(참조: Plotinus, Enneads 1, 4, 3; 6, 7, 31 등).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생명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上昇)으로 간주되었다.
(e) 대조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생명을 하강으로 보았다. 종종 포스(G5457: 빛 light)와 연관되는 조에(예를 들어 Corp. Herm. 1, 12)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것이며 신적 세계의 유형(有形)의 유동체이며 분명히 물질적 완전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며 생명을 주는 능력을 소유한 것, 곧 한마디로 말해서 불멸체(아다나시아: G110; Corp. Herm. 1, 28)인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이러한 순수 신적 생명은 물질과 혼합되어 육체 안에 갇혀 있다. 이 생명은 그 완전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단지 생명의 작고 흩어지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무아경의 환상(그노시스; →G1108, 지식 Knowledge)을 향유하기 위하여, 즉 생명의 내적 불꽃과 신적 세계의 초자연적 생명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에 도달하기 위하여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Corp. Herm. 1, 6). 이 참 생명은 이 땅에서는 무아경 ecstasy의 순간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참 생명의 완전한 향유는 미래를 위하여 예비되어야 하는 것이니 곧 현재 물질 속에 흩어져 있는 생명과 빛의 모든 입자들이 신적 세계에서 재결합하는 때이다(Corp. Herm. 12, 15:14, 10 등등).
그리하여 헬라 철학사에서 이 사상의 영역 내에는 두 가지 경향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참 생명이 점진적으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건들과 분리되어 초자연적인 신적 세계로 옮겨간다는 것이며 둘째로 생명은 점점 실체적인, 즉 "과학적인" scientific 어떤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인간의 참 생명은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에서보다는 오히려 역사 history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무아경의 환상의 순간들에 그 자체를 나타낸다.
2. 70인역본의 용법
조에는 70인역본에서 약 2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이('살아있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조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길이나 질병, 죽음과 구별되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다. 후에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참조: 마카베오사서 18:18). 고대의 비문들은 지상의 생명에 대해 언급을 한다.
(a)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생명을 자연적이고 생생한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다. 생명을 육체와, 영혼과 이성으로 나누는 헬라 사고는 그들에게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었다. 히브리어에서 네페쉬(혼, 예를 들어 수 10:28, 한글개역에는 "사람"으로 번역됨), 또는 바사르(육, 예를 들어 창 6:13)가 '하임'에 대신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올 때에는 분석적인 헬라 사고의 예로서가 아니라 통합적인 동양적 접근의 예로서이다. 동양적 접근에서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며 여기에서 인간 생명 전체가 포함되나 주어진 관점에서 관찰되는 것이다. 생명이 → 피 Blood라고 말하는 구절들에서(레 1:14, 70인 역본, 헤...프쉬케 파세스 사르코 하이마 아우투 에스틴; 참조: 레 17:11; 창 9:4; 신 12:23), 이것은 과학적인 말로보다는 고대 동양적 의식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가정(assumption)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출 12장에 나오는 유월절 의식을 참조하라). 그 목적은,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생명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생명이란 인간이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생명을 자연적, 또는 과학적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로 존속 기간, 즉 생명의 주인이신 여호와에 의해 사람에게 부여된 살아있는 날들로 생각하였다(창 25:7; 창 47:28; 신 32:39; → bios 구약성경). 장수는 순종에 대하여 약속된 신적 →(축)복 Blessing의 특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창 15:15; 창 25:8; 신 5:16; 신 30:19; 잠 3:1이하; 참조: 왕하 20:1이하.). 반면에 죽음의 권세는 질병, 증오, 또는 고독이라는 형태로 인간 생명을 침해한다(시 18:5이하; 시 33:19; 시 56:13; 시 116:8; → 죽음 Death 구약성경). 일반적으로 동양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초연(무관심)하고 관조적인(데오레티코스; 참조: 비오스, 고전 헬라어 문헌) 생명에 대한 헬라적 이상에 대해 생소하였다. 오히려 이스라엘인들의 이상은 능동적인 참여의 생활이었고 → 굶주림 Hunger, 목마름(예를 들어 삿 15:18이하), → 증오 Hatred와 → 사랑 Love(예를 들어 창 24:27), → 욕망 Desires과 육욕(예를 들어 삼상 1장; 삼하 13장)에 의해 표현되는 생명이었다. 일반적인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도 생명의 순수한 활력과 구체성과 다양성을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왕상 3:11이하; 잠 3:16; 욥 2:4). 곧 생명은 건강, 복지, 성공의 동의어였다(말 2:5; 잠 2:19; 시 56:13; 전 9:9). 그러나 생명의 본질적인 특색은 성전에 출석이었다. 이곳에서 예배자들은 생명의 창조자이신 살아계신 여호와와 찬송가운데 교제 관계에 들어갔으며 또한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여호와를 바라보는 특권을 때때로 받기까지 하였던 것이다(출 33:18이하; 시 27:4; 시 65:5; 시 84:5; 시 142:7; 아래의 구약성경 5를 참조). 오직 극도의 절망 중에 있을 때 견딜 수 없게 된 생명에 종말을 내려줄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욥 20:14이하; 욥 3:11이하; 토빗 3:10).
(b) 이스라엘인들이면 누구나 다 여호와께서 생명의 창시자로서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렘 17:13; 시 36:9; 시 139:13이하). 야훼문서기자(Yahwist)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고찰은, 이 문제에 대한 저자특유의 몇 가지 진술을 담고 있는데, 여기를 제외하면 구약 중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곳은 없다. 창 2:7에 의하면 여호와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시고 생명 없는 그 육체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그는 살아있는 존재(네페쉬 하이야)가 되었다. 이곳의 차이점은 70인역본의 프쉬케 조사(살아있는 혼, 한글개역 "성령")가 암시하는 바와 같은 육체와 영혼 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몸 Body)와 생명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감정적, 지적 생명 전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의 숨결을 회수하신다면 인간은 힘없는 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시 104:29이하; 욥 34:14이하; 참조: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Ⅰ, 1962, 149; Genesis, 19632, 71-83).
인간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시련과 환난들, 곧 수고와 실패, 수치와 두려움, 해산의 고통들은 인간의 태고에 있었던 죄에 빠진 타락에 의해 기인된 것이라고 야훼문서기자는 말하고 있다(창 3장). 야훼문서기자가 신적 형벌로 생각한 바는 죽음이라기 보다는(바벨론 포로 이전에 죽음은 인간적 상황의 주어진 요소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참조: 창 2:17; 창 3:19) 오히려 수명의 단축(창 6:3)이며 또한 특별하게는 생활의 여러 가지 시련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든 인간적 실존을 망쳐놓은 불화로서 생명의 최초의 조화는 깨어져 버렸던 것이다(참조: von Rad, Genesis, 83-99).
(c) 특별히 생명에 대한 이스라엘의 견해는 신명기에서 가정 명확하게 표현된다. → 언약 Covenant의 갱신을 기념하는 → 절기 Feast에서 예배의 공동체는 생사 간의 선택을 수반한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하는 것이다(신 30:1-20). 순종하는 자들은 축복과 번영과 생명을 약속 받는 반면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저주와 재난과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신 30:15; 신 30:19).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는 능력은 인간의 육체적 존재에까지 이르른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신명기는 참 생명은 마술적 의식과 형식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가장 많이 주장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신 32:47; 참조: 레 18:5)이기 때문이다.
(d) 동일한 식으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요구한다. 곧 이것이 절박한 재난으로 위협받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생존 기회임을 역설하는 것이다(암 5:4; 암 5:14). 이사야는 백성들 중에 사망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간 조롱자들이 있음에 대해 애통한다(사 28:15). 예레미야는 생명의 원천을 버린 믿음 없는 이스라엘 앞에 다시 한번 생사의 길을 제시한다(렘 21:8; 렘 2:13; 렘 17:13). 에스겔은 의인은 살 것이며 불경건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계속하여 강조한다(겔 3:18이하; 겔 14:20; 겔 18:4; 겔 18:9; 겔 18:13; 겔 18:17; 겔 18:20이하; 겔 33:11; 겔 37:5). 이곳에서 자연적 생명의 은사는 → 언약 Covenant의 필수불가결의 일부분이 되며, 이 언약에 대한 순종은 번영과 축복을 뜻하는 반면 위반자는 자신의 생존권을 박탈당한다. 에스겔의 환상 기사들은 종종 '루아흐 하하이야'(70인역본, 프뉴마 조에스)라는 구절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이며 생명을 주시는 권능을 뜻하는 의역적 표현(Paraphrase)이다(겔 1:20이하; 겔 10:17; 겔 37:5; 겔 37:10).
예레미야의 두 길의 구별은 지혜문학에서 사용된다. 지혜문학에서 → 지혜(Wisdom)는 사람들을 생명의 좁은 길을 따라 인도하겠다고 제의한다. 반면에 → 어리석은 Folly 자의 길은 사망에 이른다(잠 2:18이하; 잠 3:2; 잠 3:18; 잠 4:4; 잠 4:10; 잠 4:22; 잠 5:6; 잠 6:23; 잠 8:35; 잠 9:11; 잠 9:18 등).
(e) 시편에서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주시고 → 죽음 Death으로부터 건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시 16:11; 시 27:1; 시 31:4이하 등). 그러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경건한 사람들은 장수와 번영에 대한 자신들의 기대가 매일 매일의 경험에 의해 완전히 모순된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후기 시편들에서 생명에 대한 이 전통적 견해는 상대적인 것이 되며 참 생명은 여호와의 교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시 63:3). 생명은 이제 영성(spirituality)과 생명 신비주의(life-mysticism)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간주된다(G. von Rad,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and Other Essays, 1966, 258f.). 생명-신비주의는 여호와와 살아있는 교제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만족을 찾는다(시 16:5; 시 16:9이하; 시 16:23; 시 36:8이하). 시 73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확신, 그리고 이로 말미암는 안도감은 예배자에게 죽음 저편에 대한 소망을 준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길들을 정당화할 필요성에 직면하여, 또한 여호와의 언약적 약속들에 대한 신실함을 확신할 때, 구약의 신자는 무덤 저편의 더 나은 것들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즉 생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종말론적이 되는 것이다. "마술이나 신화와는 완전히 다르게, 단지 하나님과의, 부인할 수 없는 교제에 대한 확실성에 근거한 확신이 성장했다"(G. von Rad, op. cit. 264; 참조. 시 49:16; 욥 19:25이하; → 죽음 Death, art. thanatos, 구약성경 2(e)).
지금까지는 개개인의 시편 기자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내생에 대한 소망이 이제 묵시 가운데는 온 민족에 의해 소유되는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되었다(사 29:19; 단 12:2; 참조: SB Ⅰ, 885f.; D. S. Russell, The Method and Massage of Jewish Apocaliptic 200 B.C.-A.D. -100, 1964, 353-90).
70인역본은 종종 헬라어 '조에'의 관점에서 생명에 대한 구약적 견해를 재해석한다(참조: 70인역본 신 32:39; 시 55:14[시 56:13]; 시 118[119]; 삼 16:15; 욥 19:25; 욥 33:30).
후기 유대주의는 대부분 생명에 대한 구약적 견해를 받아들였다(Meg. 27b; Tann. 20b; Ber. 55a; 참조. SB Ⅳ 267, 275, 629). 그러나 헬레니즘의 영향하에서 참 생명은 점점 영생(조에 아이오니오스), 곧 끝 없는 생명이라는 은사로 나타났다(마카베오 사서 7:19; 15:3; 16:25; 17:12; 18:19 등)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영생은 조에(유다의 유훈 25:1), 또는 '젠'(솔로몬의 시편 15:15)으로 단순하게 언급될 수 있었다. 마카베오시대 이후부터 내세에 대한 신앙 곧 → 부활 Resurrection과 영생은 유대 신학자들 중에 널리 퍼졌다(참조, SB Ⅲ 481 f.). 영지주의에 나오는 바와 같이 후기 유대주의에서도 조에는 종종 포스(빛) 및 그노시스(지식)와 관련하여 나온다(참조, 호 10:12, 70인역본).
헬레니즘 유대교에서 죽은 자의 → 부활 Resurrection에 대한 신앙은 → 영혼 Soul의 불멸성에 대한 교리로 주로 대체되었다(Wis. 8:19f.; Jose Phus, War 7, 8, 7). 세속적 생명은 중요성(Significance)를 상실하거나(Wis. 4:8f.), 또는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Philo, Leg. All. 2, 57; 3, 21, 151). 죽는 행위는 점점 더 중요성을 획득하였고(마카베오 사서 15:12; 마카베오 이서 8:21; Josephus, War 7, 8, 7), 참 생명, 즉 아다나토스(불멸의) 생명은 내세로 옮겨지게 되었다(마카베오 사서 15:3; Pss. Sol. 3:16; Philo, Op. Mund 155f.).
반면에 쿰란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용법은 구약의 용법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오직 새로운 특징은 생명과 구원의 축복들과의 약간 공식적인 관련인 것이다(1QS 3:7; 4:7; 1QH 2:20, 31; 9:66; 1QM 1:9; 12:3; CD 3:20).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조에는 신약성경에서 13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조에는 자연적 생명을 나타낸다.
① 조에는 자연적 죽음과 구별되는 자연적 생명을 가리킨다.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② 눅 16:25에서 '살아있는 동안'을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2:15; 행 8:33에서도 마찬가지이다.
③ 고전 15:19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표현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딤전 4:8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지며, "내 생"과 대조되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④ 약 4:14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생명을 묘사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⑤ 히 7:3에서 '생'의 끝을 묘사한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⑥ 계 11:11에서 '생'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참조: 창 6:17; 창7:15).
(b)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초자연적 생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 생명은 신자들이 미래에 받을 것이지만, 이 땅에서 지금 향유하는 것이다.
① 요일 5:20에서 하나님은 참 생명, 곧 영생이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 5:26a에서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2:50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영생이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② 요 5:26b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셨다.
요 1:14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요일 5:11에서도 이를 증거한다.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행 3:15),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1). "이 생명이 인간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이다"(요일 1:2). 그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요 6:48; 요 6:33). 그는 단순히 "생명"이란 말로 표현되었다(요 11:25; 요 14:16). 그는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며(요 1:4b)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c)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신자들의 생명을 나타낸다.
① 이 생명은 은혜와 거룩의 생명이다.
롬 6:4에서 우리는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엡 4:18에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을 묘사한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② 이 생명은 구원과 영광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며(딤후 1:1), 그의 말씀과 복음의 전도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한다, 요 6:68; 요 6:63; 행 5:20; 빌 2:16; 딤후 1:10; 고후 4:12. 사도들은 복음의 전도로, 사람들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후 2:16).
③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 롬 8:2; 롬 8:6; 롬 8:10; 요 6:63.
④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엔톨레)도 생명에 이르게 한다, 롬 7:10.
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되었다, 딤후 1:1에서 "썩지 아니할 것"과 함께, 벧후 1:3에서 "경건"과 함께, 롬 8:6에서 "평안"과 함께 나타난다.
⑥ 진실로 생명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 곧 은혜의 선물의 상속자들이다, 벧전 3:7.
⑦ 이 생명은 그들이 육체로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 골 3:3.
⑧ 그의 생명을 상실 당한 자는 누구든지 영광의 생명에서 제외된다. 행 11:18; 행 13:46; 행 13:48.
⑨ 특별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생명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참조: 요 15:17), 기쁨(참조: 요 16:20-요 16: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 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d) 조에는 종말의 복된 시대에서 누릴 생명에 대해 사용되었다: 요 3:15.
① 내세의 영생, 마 10:30; 눅 18:30; 막 19:29.
② 영생에 대한 질문,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19:16이하.
③ 마지막 심판의 결과, 마 25:46; 롬 2:7; 마 7:14; 마 18:8이하; 막 9:43, 막 9:45; 롬 5:17이하, 롬 5:21; 롬 6:22이하.
④ 죽은 상태에서 나온 자들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딤전 6:12, 딤전 6:19; 벧전 3:10.
⑤ 이 생명은 참 생명으로 불리워진다, 딤전 6:19; 딛 1:2; 딛 3:7.
⑥ 생명 책, 빌 4:3; 계 3:5; 계 13:8; 계 17:8; 계 20:12, 계 20:15; 계 21:27.
⑦ 생명의 나무, 계 2:7; 계 22:2; 계 22:14; 계 22:19.
⑧ 생명의 면류관, 계 2:10.
⑨ 생명수, 계 21:6; 계 22:1; 계 22:17; 계 7:17.
(참조: Walter Bauer; H.G.Link; R.Bultmann).
[참고 -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에 생명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나온다. 생명의 교리가 가장 명백하게 표현된 곳은 바울과 요한의 신학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와 헬라에서 유래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a) ① 생명에 대한 구약성경의 견해는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자연적 생명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재산으로 간주된다(막 8:37). 예수님께서는 종종 병든 자들이나 죽어가는 자들을 소생시키기 위하여(막 5:23, 부정과거 '제세', 그녀가 살도록 that she may live; 참조: 요 4:47이하), 또는 이미 죽은 자에게 이 세상의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시라는 청을 받으셨다(막 5:35이하; 눅 7:11이하; 요 11:1이하).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시간적 범주들이 생명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눅 1:75; 참조: 히 7:3; 롬 7:1이하). 그리고 이 생명은 동적(動的)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나 동시에 제한되고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창 17:28; 약 4:14). 이것은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성공하거나 또는 실패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눅 15:13, '아소토스 젠': 방탕하게 살다; 딤후 3:12, '유세보스젠':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을 살다). 참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마 4:4; 신 8:3의 인용). 반면에 하나님과 떠나 사는 것은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눅 15:24; 눅 15:32). 음식과 의복 같은 생명의 기본적 필수품들은 절대로 멸시되지 않고 오히려 창조주의 은사로도 고맙게 받아들여진다(마 6:25이하; 눅 12:15). 죽이고 살릴 수 있으신 하나님(마 10:28; 롬 4:17)께서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창조주이시며(행 17:25), 주님이시며(눅 12:20; 행 10:42; 약 4:15), 생명의 구현이시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마 16:16; 막 26:63),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막 12:27; 눅 20:38).
② 현재의 생명 너머에 장차의 생명이 위치한다(막 10:30; 딤전 4:8,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조에스 테스 쉰 카이테스 멜루세스] 약속이 있느니라"). 이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조에 아이오니오스; 마 19:16 병행구 막 10:17; 눅 18:18; 마 25:46; 참조: 딤후 1:10, 조에 카이 압흐다르시아: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사람은 이 생명을 영혼의 불멸의 이성에 의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이 헬라 사상은 신약에서 완전히 이질적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사이다(마 22:31이하; 병행구 막 12:26이하; 눅 20:36이하). 미래의 생명이 종종 '조에'의 단독적 사용으로 즉 어떤 수식어구 없이 언급된다는 사실은(위의 구약성경 6을 보라). 이러한 생명이 실제적이고 참된 하나님 자신의 생명으로 간주되는 것을 지적한다(마 18:18; 막 9:43; 막 9:45). 한편, 여기에서 후기 헬레니즘에서 발견되는 이 세상의 생명의 평가 절하에 대한 암시는 없다. 반대로 현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내생에 있어서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마 19:16 병행구 막 10:17; 눅 18:18; 눅 10:25). 마 7:13이하(참조: 눅 13:23이하)는, 신 30:19; 렘 21:8, 지혜문학과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 쿰란과 후기 기독교문헌들에서 발견되는 두 길에 대한 사상을 사용한다(참조: 잠 8:20; 잠 9:6; 잠 12:15; 잠 16:25; 2Esd. 7:7ff.; Test Ash. 1:3, 5; Pirke Aboth 2:12f. 1QS 3:20; Did. 1:1; Barn. 18:1; → 걷다 Walk, art. hodos; 위의 구약성경 4도 보라). 현재의 생명과 미래의 생명 간의 밀접한 관계는 최후의 → 심판 Judgment에 대한 비유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나타난다. 곧 불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며 의로운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마 25:46).
(b) ① 생명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부활 → Resurrection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전 15:4). 그리스도의 부활은 완성된 사실로서, 사망을 능가하는 신적 생명의 권능을 증명하였다(롬 14:9).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살리시는 권능, 곧 사망을 정복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권능의 구현으로 본다(고후 13:4).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생명, 무덤을 초월한 생명을 의미한다.
마지막 → 아담 Adam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위한 새 생명의 창시자가 되셨다(롬 5:12이하; 고전 15:20이하). 기독교인들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살고 계시며(갈 2:20; 빌 1:21),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고후 4:10).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에 의해 칭의되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롬 5:10). 그리스도의 생명이 기독교인들에게 전달된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하나의 능력으로서도 아니고 신비적 결합을 통한 것도 아니며 생명의 말씀(→ 말 Word, 빌 2:16; 참조: 딤후 1:10; 딛 1:2이하)과 살리시는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롬 8:2; 롬 8:6; 롬 8:10이하; 고전 15:45).
② 성령을 통해 행하는 신자들의 이 새 생명은(롬 6:4) 매일의 생활에서 스토아파나 영지주의적인 무관심과 금욕주의로 회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바울이 이 생명을 보는 바처럼 기독교인은 자신의 이웃을 책임 있게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위한 생활을 더 이상 영위하지 않고(롬 14:7; 고후 5:15) 하나님과(롬 6:10이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롬 14:8; 고후 5:15), 그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 십자가 Cross를 취할 때(고후 4:9이하) 그의 삶은 긍정적이며 구체적 결과를 나타낸다(갈 5:25-26). 그러므로 바울은 역설적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8이하). 이는 생명이 죽음을 통하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의미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자세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롬 13:8-10; 롬 14:11이하). 바울이, "~를 위해 사는 것"(living for)과 ~와 함께 사는 것(living with)이 바로 생명의 구성요소에 속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자오(G2195)와 함께 사용하는 여격과 쉰(G4862) 구문들을 주의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③ 신자의 새 생명에는 현재와 미래, 직설법과 명령법 간에 하나의 긴장상태가 있다(갈 5:25). 신자의 새 생명은 이미 실존하는 것이지만 아직 완전히 명백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골 3:3-4). 그리스도의 → 부활 Resurrection은 우리 자신의 미래에 있을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보증이다. 이 미래의 영생의 부활에서 사망과 또한 현 창조의 모든 불완전들은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롬 8:18이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조오포이에데손타이, 고전 15:22; → 아담 Adam).
새 생명은 역사적인 시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정복되는 때의 영생을 지향하는 것이다(고전 15:26; 고전 15:28; 롬 6:22; 갈 6:8). 바울은 우주적인 드라마, 곧 기적적인 변형(trans formation)과 휴거(rapture)에 의한, 현세적인 생명으로부터 영생으로의 변화를 묘사한다(살전 4:13-17; 고전 15:20이하; 고전 15:35이하; 고전 15:51이하). 여기에서 바울은 묵시적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묵시적 표현과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후기 유대주의의 추상적 사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이 취할 형태에 대한 비유적 암시에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것은 육체가 있는 생명이 될 것이며(고전 15:35이하; 참조: 고후 5:7; 유대인들은 육체가 없는 생명을 상상할 수 없었음에 유의하라; 몸 Body), → 얼굴 Face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과(고전 13:12; 참조, 고후 5:7)의 → 평화 Peace와 → 기쁨 Toy(롬 14:17)과 → 영광 Glory 독사(doxa, 고후 3:8이하), 또는 영화(榮化)(glorification 롬 8:17)의 충만에 들어가는 것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이다(살전 4:17; 고후 5:8; 빌 1:23).
(c) ① 요한은 말씀(the Word)이 성육신 전부터 영원한 생명이었다고 묘사한 이 말씀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사 인간들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셨으니(요 1:4; 요일 1:1이하), 곧 그는 과거의 창조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모두 신적 생명과 권능의 근원이시다. 그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되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씀으로 영생을 전달하시는 것만이 아니라(요 6:68; 요 10:28; 요 12:50; 요 17:2), 그 자신이 참 생명이시니(요일 5:20), 곧 그의 여러 가지 "나는 이다"(I am)라는 말씀들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요 6:35; 요 6:48),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영원하신 성부의 선재하시는 아들은 자신의 말씀에 의해서, 또한 자신의 인격 안에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요 6:33; 요 10:10; 요일 4:9).
② 하나님의 생명은 → 믿음 Faith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요일 5:12), 곧 영생을(요 6:40; 요 6:47) 소유하였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요일 3:14).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은 사랑과(요 15:9-17) 기쁨(요 16:20-24) 안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요일 3:14에 따르면 형제 간의 사랑은 참 생명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③ 비록 요한의 생명에 대한 견해에 많은 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요한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생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로 옮겨버린 반면에 요한은 영생을 바로 현재로 가져오며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명과 인격에 굳게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요 17:3). 이 영생을 지금 이곳에서 소유하는 신자들은, 사망과 심판이 더 이상 생각할 요소들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요 5:24; 요 11:25). 왜냐하면 영생은 그 안에 영원의 씨앗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4:14; 요 6:27; 요 12:25).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데오로신 텐 독산, 요 17:24) 자신들의 구원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참조: R. Bultmann, TDNT Ⅱ 870f.).
(d) 요한계시록은 → 인자(Son of man)의 전승을 죽임을 당한 → 어린 양 Lamb의 비유에 결합시킨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이하; 참조: 계 1:13이하; 계 4:9이하). 요한복음이 헬라주의의 배경을 갖고 완전히 현재적 생명에 전념하는 반면에 계시록은 유대 전통들로 되돌아가 오직 내생에만 관계한다. 새 → 예루살렘 Jerusalem의 환상 가운데에서, 에덴 동산의 이야기(창 2:9-17)를 통해 낯익은 생명나무와 생명수에 대한 신화적이며 고대 동양적 묘사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도성에서의 충만한 생명의 상징들로 다시 나타난다(계 22:2-14; 계 22:19; 계 21:6; 계 22:1; 계 22:17). 새 → 하늘 Heaven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멸망 받고(참조: 바울, 고전 15:26)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영생이 온전한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있어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이하). - H. G.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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